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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노우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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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노우라 전투는 1185년 간몬 해협 단노우라에서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이끄는 겐지 군과 다이라노 무네모리가 이끄는 헤이케 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헤이시는 이치노타니 전투 패배 후 야시마와 히코섬으로 거점을 옮겼으나, 요시쓰네의 기습과 노리요리의 규슈 차단 작전으로 고립되었다. 전투는 조류 변화를 이용한 헤이케의 초기 우세에도 불구하고 겐지의 반격으로 이어졌고, 헤이케는 멸망했다. 이 전투로 헤이시 정권이 붕괴되고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되어 일본 최초의 무가 정권이 시작되었다. 전투의 경과와 조류의 영향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하며, 삼종신기 수몰 여부에 대한 논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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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노우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전투 이름단노우라 전투
로마자 표기Dan-no-ura no tatakai
한자 표기壇ノ浦の戦い
날짜1185년 4월 25일 (율리우스력), 1185년 5월 2일 (그레고리력)
장소단노우라, 시모노세키 해협
전투 정보
일부겐페이 전쟁
결과미나모토 가문의 승리, 다이라 가문 멸망
전투 원인알 수 없음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미나모토 가문
교전 세력 2다이라 가문
지휘관
지휘관 1미나모토노 노리요리(육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해상)
가지와라 가게토키(첩보)
고노 쓰신(해상)
다구치 시게요시(배신)
탄조
지휘관 2안토쿠 천황(사망)
다이라노 도키코(사망)
다이라노 무네모리(처형)
다이라노 도모모리(사망)
다이라노 노리쓰네(사망)
다이라노 노리모리(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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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아리모리(사망)
다이라노 유키모리(사망)
다이라노 도키타다(추방)
다이라노 기요무네
다이라노 가게키요(포로, 1년 후 사망)
병력 규모
병력 1800척 (또는 3,000척)
병력 2500척 (또는 1,000척)
사상자
사상자 1알 수 없음
사상자 2전멸
기타
안토쿠 천황 연기 회도
안토쿠 천황 연기 회도, 아카마 신궁 소장

2. 배경

1183년 7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에게 공격받은 헤이시는 안토쿠 천황삼종신기를 모시고 수도를 떠났다. 이후 가마쿠라 정권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 사이의 대립을 틈타 셋쓰국 후쿠하라로 복귀했으나, 1184년 2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대패하고, 바다로 도망쳐 사누키국 야시마나가토국 히코섬(현재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거점을 마련했다.

가마쿠라 정권은 요리토모의 동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에게 규슈 방면 공격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에게 야시마 공격을 맡겼다. 1185년 요시쓰네는 기습으로 야시마를 공략(야시마 전투)했고, 헤이케 총대장 다이라노 무네모리는 안토쿠 천황을 모시고 해상으로 도망쳐 시도에서 세력을 정비했으나 그곳도 요시쓰네군에게 쫓겨 세토 내해를 전전하던 중 히코섬에 거처를 마련하여 헤이케는 히코섬으로 고립되었다.

전투 당시 헤이케는 삼종신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전 전투 이후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그러나 다가오는 전투는 그들의 본거지에서, 숙련된 남쪽 출신 병사들이 그들의 고향 바다에서 싸우는 전투였다. 헤이케는 (배의 수는 더 많았지만) 더 약했지만, 미나모토보다 그 지역의 조류와 해전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2] 헤이케는 어린 안토쿠 천황을 궁중 의복을 완전히 차려 입힌 채 데려왔는데, 이는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고 그들의 대의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2. 1. 가마쿠라 막부의 전략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동생 노리요리에게 3만 기(騎)를 이끌고 산요도를 통해 규슈로 진군하여 헤이케 군의 배후를 차단하는 작전을 지시했다. 그러나 노리요리군은 병량 부족과 헤이케 수군의 저항으로 진군이 멈춰 규슈로 건너갈 수 없었다.

이후 노리요리군은 병량과 병선(兵船)을 조달하여 규슈 상륙에 성공, 아시야우라 전투에서 헤이케 군을 격파하고 헤이케 군의 배후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헤이케 군은 히코시마에 고립되고 말았다.[7]

2. 2. 요시쓰네의 독자적 판단과 야시마 전투

요시쓰네고시라카와 법황에게 헤이케 토벌을 청하여 허락을 받고 야시마로 출진했다. 이는 요리토모의 명령이 아닌 요시쓰네의 독자적인 판단이었다는 견해가 있다.[7] 겐랴쿠 2년/주에이 4년(1185년) 2월, 요시쓰네는 기습으로 야시마를 공략(야시마 전투)했다. 헤이케 총대장 다이라노 무네모리안토쿠 천황을 모시고 해상으로 도망쳐 시도에서 세력을 정비했으나 그곳도 요시쓰네군에게 쫓겨 세토 내해를 전전하던 중 히코섬에 거처를 마련했다.

3. 전투 경과

1185년 3월 24일,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이끄는 겐지 수군과 다이라노 도모모리가 이끄는 헤이케 수군이 간몬 해협의 단노우라에서 충돌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편찬한 역사서 《아즈마카가미》에는 "오각(午刻, 12시경)에 이르러 헤이케의 패배로 끝났다"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어 전투의 구체적인 경과는 알 수 없다.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헤이케 이야기》, 《겐페이 성쇠기(源平盛衰記)》 등의 군기물(軍記物)을 바탕으로 알려진 전투 경과는 다음과 같다.

요시쓰네는 셋쓰국의 와타나베 수군, 이요국의 고노 수군, 기이국의 구마노 수군 등을 우방으로 삼아 840척(《아즈마카가미》)의 수군을 편성했다. 한편, 헤이케 군은 5백 척(《아즈마카가미》)의 배를 마쓰라토 100여 척, 야마가 히데토 300여 척, 헤이케 일문의 100여 척(《헤이케 이야기》)으로 편성하고, 다이라노 무네모리의 동생인 도모모리가 대장으로서 지휘를 맡았다.

단노우라 전투 전황 추정도


12시경 간몬 해협의 단노우라에서 양측 수군이 충돌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노리요리군은 3만여 기(《겐페이 성쇠기》)를 거느리고 육지에 포진해 헤이케의 퇴로를 막고, 벼랑에서 화살을 쏘며 요시쓰네군을 지원했다.

전투 초반에는 헤이케가 유리한 듯 보였다. 헤이케는 삼종신기를 보유하여 덴노의 권위를 상징했지만, 이전 전투에서 영토 대부분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헤이케의 본거지에서 벌어졌고, 숙련된 남쪽 출신 병사들이 고향 바다에서 싸우는 전투였다. 헤이케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미나모토보다 조류와 해전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초반에는 원거리 사격전이 주를 이루었고, 헤이케는 조류를 이용하여 겐지 군을 포위하려 했다. 이후 배들이 육박전을 벌이면서 접근전으로 이어졌으나, 조류가 바뀌면서 겐지에게 유리해졌다.[4] 다구치 시게요시(田口重義)가 배신하여 헤이케의 후방을 공격하고, 안토쿠 천황이 탄 배를 알려주면서 겐지 군은 덴노의 배에 화살을 집중하여 헤이케 수군을 무력화시켰다.[3]

3. 1. 전투 전 군사 회의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전투 전 군사 회의에서 군감(軍監)[17] 가지와라 가게토키는 자신이 선봉에 나서기를 원했으나, 요시쓰네는 자신이 선봉에 서겠다고 이를 거부했다. 가게토키는 "대장이 선봉에 선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다. 장수의 그릇이 아니다."라며 요시쓰네를 비웃었고, 칼부림 직전까지 가는 대립이 벌어졌다. 이는 훗날 가게토키가 요리토모에게 요시쓰네를 참언하는 계기가 되어, 요시쓰네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17]

3. 2. 헤이케의 전략과 초기 우세

헤이케 군은 500척의 배를 세 부대로 나누어 편성했다. 마쓰라토 100여 척, 야마가 히데토 300여 척, 헤이케 일문 100여 척으로 구성되었다.[16] 다이라노 무네모리의 동생인 도모모리가 대장으로서 지휘를 맡았다. 도모모리는 안토쿠 천황과 본영이 있는 대형 당선(唐船)에 병력을 숨겨 겐지 군을 유인, 포위하는 작전을 세웠다.[18]

간몬 해협은 조류 흐름의 변화가 심한 곳이었다. 수군 운용에 뛰어났던 헤이케군은 빠른 조류를 타고 겐지 군에 무수한 화살을 쏘아 압박했다. 반면, 대부분이 수전(水戰)에 취약한 반도 출신 무사들로 구성된 요시쓰네군은 만주시마(滿珠島)와 간주시마(干珠島) 근처까지 밀려났고, 기세가 오른 헤이케군은 요시쓰네를 죽이기 위해 맹공을 가했다.

3. 3. 겐지의 반격과 헤이케의 멸망

조류의 흐름이 바뀌자 겐지 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이를 틈타 헤이케 군을 압박했다. 헤이케 측에서는 배신자가 속출했는데,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아와 시게요시(阿波重能)의 수군 3백 척이 배신하여 헤이케 군의 계략을 요시쓰네에게 밀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즈마카가미》에 의하면 아와 시게요시는 전투 후 포로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실제 사정은 불분명하다.[20] 비전투원인 뱃사공과 조타수를 공격하는 겐지의 전술에 헤이케 수군은 무력화되었다.

헤이케의 패색이 짙어지자, 다이라노 도모모리는 겐레이몬인(안토쿠 천황의 어머니)과 니이노아마(안토쿠 천황의 외할머니이자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아내) 등이 타고 있던 배에 올라 "보기 흉한 것은 버리거나 치우시오. 조금 있으면 신기한 간토 남자를 보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니이노아마는 죽음을 결의하고 어린 안토쿠 천황을 품에 안고, 보검을 허리에 차고, 신새(神璽)를 껴안은 채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로 가는 겁니다. 파도 아래에도 수도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안토쿠 천황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20] 《아즈마카가미》에 의하면 니이노아마는 보검과 신새를 갖고 입수, 아제치노 쓰보네가 안토쿠 천황을 안고 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겐레이몬인 등 헤이케 일문의 여자들도 뒤이어 바다에 몸을 던졌다.

다이라노 노리모리와 다이라노 쓰네모리 형제, 다이라노 스케모리, 다이라노 아리모리, 다이라노 유키모리 등도 바다에 투신했다. 헤이케의 동량이자 총사령관이었던 다이라노 무네모리도 장남 다이라노 기요무네와 함께 입수했으나, 목숨이 아까워 다시 떠올랐고 요시쓰네 군에게 사로잡혔다.

헤이케 일문 가운데 무예가 뛰어났던 다이라노 노리쓰네는 귀신 같은 무력으로 겐지 무사들을 공격했으나, 도모모리가 사람을 시켜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기에 무의미한 짓"이라고 전하자, 요시쓰네를 길동무로 삼겠다며 요시쓰네의 배로 올라탔다. 노리쓰네가 나기나타를 휘두르며 도전하자 요시쓰네는 재빨리 8척이나 떨어져 있는 다른 배로 뛰어넘어 도망쳤다. 마지막 순간에 노리쓰네는 "가마쿠라에 가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한 마디 해줘야겠다. 나를 잡아 공을 세우고 싶은 놈은 누구든지 와서 덤벼라!"라고 일갈하며 겐지 측 장사 3명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다.[22]

도모모리는 "내가 봐야 할 것을 모두 본 것 같구나."라고 중얼거리고 갑옷 두 개를 껴입고 다이라노 이에나가와 함께, 몸에 닻을 매달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신각(申刻, 16시경) 헤이시 일문의 대부분이 죽거나 사로잡혔고[23], 겐지의 승리와 함께 헤이케는 몰락했다.

4. 전후

단노우라 해전 이후, 바다에 빠진 겐레이몬인은 구조되었고, 삼종신기 중 내시소(內侍所)와 신새(神璽)는 회수되었으나, 니이노아마와 함께 물에 뛰어든 안토쿠 천황은 붕어하고, 보검도 바다에 가라앉았다. 안토쿠 천황의 이복 동생인 모리사다 친왕은 구출되었다.

요시쓰네는 헤이케 일문의 동량인 다이라노 무네모리와 기요무네 부자를 포함한 포로들을 데리고 교토로 개선했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이를 치하하며 요시쓰네와 그 휘하의 고케닌들을 임관(任官)했다. 그러나 요리토모가마쿠라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관위를 받은 것에 격노하여, 이들의 도고쿠 귀환을 금지했다. 또한 가지와라 가케토키가 요시쓰네의 교만과 전횡을 고소하고, 요시쓰네가 다이라노 도키타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도 요리토모를 분노하게 했다.

1185년 5월, 요시쓰네는 무네모리 부자를 호송한다는 명목으로 가마쿠라로 향했으나 고시고에(腰越)에서 멈춰야 했다. 요시쓰네는 고시고에장(腰越狀)을 써서 요리토모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무네모리 부자는 오미국에서 참수되었다.

이후 요시쓰네는 요리토모에게 용서받지 못하고 대립이 심화되자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25]를 얻어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거꾸로 요시쓰네 추토의 선지가 내려지자 몰락하여 오슈 후지와라 씨에게 도망쳤으나, 1189년 윤4월에 히라이즈미에서 살해되었다.

전투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겐레이몬인은 출가하여 오하라에 있는 적광원에 은거했다. 모리사다 친왕은 출가했고, 다이라노 도키타다는 노토국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헤이케의 25년에 걸친 권세는 사라지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마쿠라 막부를 열고 일본 최초의 무가 정권을 확립했다.

4. 1. 정치적 영향

다이라 씨 군대의 패배는 다이라 씨의 일본 지배 야망을 종식시켰다.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형인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최초의 쇼군이 되어 가마쿠라가마쿠라 막부를 설립했다. 이 전투에서 다이라 씨는 다이라 도모모리, 다이라 노리츠네, 다이라 노리모리, 다이라 쓰네모리, 다이라 스케모리, 다이라 아리모리, 다이라 유키모리 등을 잃었는데, 이들은 모두 전사했다.

1185년, 장주(長州) 단노우라 해협에서의 전투.

5. 조류설 논쟁



간몬 해협의 조류 변화가 단노우라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는 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가 편찬한 역사서 《아즈마카가미》에는 전투에서의 조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군담소설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헤이케가 밀려오는 조수, 겐지가 마주치는 조수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조류가 뒤바뀌어 전황을 역전시켰다는 내용은 없다.[16]

현재 알려진 전투에서 조류의 영향은 다이쇼 시대구로이타 가쓰미가 자신의 저서에서 제창한 설에 기반한다.

5. 1. 구로이타 가쓰미의 조류설

1914년 다이쇼 3년, 도쿄제국대학의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 교수는 저서 「요시쓰네전(義経伝)」에서 단노우라 전투에 대한 조류의 영향을 주장했다.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의 일기 《교쿠요(玉葉)》의 기록대로 전투가 오후 12시에서 16시까지 벌어졌다고 보았다. 구로이타는 당시 일본 해군수로부(海軍水路部)의 조류 조사를 토대로, 오전 8시 30분에 서쪽으로 흐르던 조류가 동쪽으로 바뀌고 오전 11시경에는 8노트에 달해 오후 3시경에는 조류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밝혔다.[26]

구로이타는 조류가 동쪽으로 흐르던 시간대에는 헤이케(平家)가 우세하였으나, 서쪽으로 바뀌었을 때 겐지(源氏)가 우세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설은 단노우라 전투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인 검증이었기에 정설로 널리 받아들여졌다.[26]

5. 2. 조류설에 대한 반론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단노우라 전투가 벌어진 날은 소조류(小潮流) 시기여서 8노트에 달하는 빠른 조류는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26] 또한 실제 전투 해역은 하야토모 세토처럼 좁은 곳이 아니라 만주시마, 간주시마 주변의 넓은 해역으로 추정되며, 이 해역의 조류는 1노트 이하였기 때문에 전투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26]

일본 해상보안청의 조류 조사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하야토모 세토 동쪽 해역은 1노트 이하였다는 결과가 나왔다. 선박사(船舶史)를 연구한 이시이 겐지(石井謙治)는 같은 조류를 탄 배의 상대속도는 변하지 않으므로 조류는 전투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도쿄상선대학 이지마 유키히토(飯島幸人) 명예교수도 "배들끼리의 상대 운동에는 조류는 관계없다"며 조류설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6. 삼종신기 수몰 논란

일반적으로 삼종신기 중 아마노무라쿠모노쓰루기(天叢雲剣)는 단노우라 전투에서 수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이케 모노가타리와 아즈마카가미의 기록에 따르면, 니이노아마(다이라노 도키코)가 안토쿠 천황과 보검을 안고 바다에 투신했으며, 이후 보검은 분실되었다고 전해진다.[2] 2005년 NHK 대하드라마 "요시쓰네"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묘사하여, 마쓰자카 게이코가 분한 도키코가 안토쿠 천황과 아마노무라쿠모노쓰루기를 안고 바다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때 수몰된 검은 궁중 의식에 사용되는 모조품이고, 진품은 아쓰타 신궁(熱田神宮)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설도 있다. 1991년 일본텔레비전방송망의 연말시대극스페셜 "원의경"에서는 이 설을 채택하였다.

7. 현대적 연구

히시누마 가즈노리(菱沼一憲)는 그의 저서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전투와 전략 그 전설과 실상》(2005)에서 단노우라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야시마 전투에서 승리한 요시쓰네는 한 달 동안 군비를 정비하면서 고노 미치노부(河野通信) 등 수군 세력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세토 내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반면 헤이케(平家)는 히코시마(彦島) 외에는 거점이 없었고, 병량과 무기 보충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노리요리군에 의해 규슈(九州) 방면 퇴로도 막혀 있었다.

전투는 정오경에 시작되었다. 헤이케는 초반에 맹렬하게 화살을 쏘아대며 대등하게 싸웠지만, 화살이 떨어지자 요시쓰네군과 노리요리군에게 밀리게 되었다. 방어 장비가 부족했던 뱃사람과 뱃사공들이 희생되면서 헤이케 측의 배는 움직임이 둔해졌고, 여러 장수들이 가마쿠라 측으로 배신하기 시작했다. 결국 헤이케 일문은 차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는 노리요리군의 규슈 제압, 요시쓰네군의 시코쿠(四国) 제압, 가마쿠라 측의 세토 내해 제해권 장악으로 인한 포위 및 고립의 결과였다.[2]

8. 단노우라 전투를 다룬 작품

가요, 만화, 보드게임, 비디오 게임,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에서 단노우라 전투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 가요: 미나미 하루오(三波春夫) - 단노우라 결전
  • 만화: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 불새 난세편
  • 보드게임: 에포크사(エポック社) EWE 시리즈 - 결전 단노우라
  • 비디오 게임: 겐페이 토마덴(源平討魔伝)
  • 희곡: 키노시타 준지(木下順二) - 자오선의 제사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1964년 영화 가위댄의 세 번째 이야기인 "귀 없는 호이치"에도 이 전투가 등장한다.

태국계 미국인 작곡가 S. P. 솜토우의 오페라 ''단노우라''는 이 전투를 주제로 하며, 2014년 방콕에서 초연되었다.

2021년 애니메이션 영화 이누오에서도 서술 부분에서 이 전투가 언급된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헤이케 이야기'' 10화와 11화에서도 이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Fighting Ships of the Far East (2): Japan and Korea AD 612-1639 Osprey Publishing 2003
[3] 서적 The Tales of the Heike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5]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Inc.
[6] 문서 Dannoura: Historic Japanese Battleground that Marked the Rise of Samurai Supremacy
[7] 논문 元暦西海合戦試論-「範頼苦戦と義経出陣」論の再検討-
[8] 서적 日本の武将7 源義経 人物往来社
[9] 서적 日本の戦争史 6 源平の争乱
[10] 문서 壇ノ浦の戦いで深傷を負った平家の武将が水溜まりを見つけ、飲んでみると真水だった。もう一口飲もうとしたら塩水になっていたという伝説が残る。
[11] 문서 『吾妻鏡』によると、義経は腰越から鎌倉に入れてもらえないとされている。一方、延慶本『平家物語』では、義経は一旦鎌倉蔵に入り頼朝と対面するが、鎌倉のはずれに止め置かれた後義経は都に戻ったとある。
[12] 문서 鎌倉幕府の成立年には、頼朝が東国支配権を樹立した治承4年(1180年)、寿永二年十月宣旨により東国支配権が事実上公認された寿永2年(1183年)、公文所及び問注所を開設した元暦元年(1184年)、文治の勅許により守護・地頭職の設置・任免が許可された文治元年(1185年)、日本国総守護地頭に任じられた建久元年(1190年)、征夷大将軍に任じられた建久3年(1192年)などの諸説がある。
[13] 간행물 実証 壇の浦の合戦「NHK歴史への招待 6巻 義経騎馬軍団 壇ノ浦合戦」(日本放送出版協会)
[14] 서적 和船 II 法政大学出版局
[15] 문서 ドラマでは二位尼が安徳天皇と弟の守貞親王をひそかに入れ替えさせ、海に没したのは実は守貞親王だったという設定になっている。
[16] 문서 거리의 단위 1정은 60간(間). 1간은 약 1.8m.
[17] 문서 군대에 있던 감시자. 감찰사같은 느낌을 갖고 있음.
[18] 문서 당나라식 배
[19] 문서 《교쿠요(玉葉)》에서.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오전
[20] 서적 日本の戦争史 6 源平の争乱
[21] 문서 긴 자루 끝에 휘어진 칼이 달린 무기
[22] 문서 《아즈마카가미》에 의하면 노리쓰네는 이 이전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술이 되어 있다. 그러나 《다이고 잡사기(醍醐雜事記)》에서는 단노우라에서 죽은 인물 중 한 명으로 노리쓰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23] 문서 《교쿠요》.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오각(12시경)이라고 하였다.
[24] 문서 궁녀, 귀족의 시녀
[25] 문서 천황의 말. 그것을 기록한 문서나 전하는 관원을 말함.
[26] 간행물 실증 단노우라 전투 “NHK역사로의 초대 6권 요시쓰네 기마군단 단노우라 전투(歴史への招待 6巻 義経騎馬軍団 壇ノ浦合戦)(日本放送出版協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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